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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7 23:46
[출처] 뉴스메이커 759호  2008.1.22 박주연 기자
고위직 진출 장벽 ‘유리천장’ 여전히 존재… 사회활동 여성 수에 비해 리더직은 극소수

"여성 리더십의 승리? 소리는 요란하나 유리 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주 전 세계로 타전된 미국발 가장 뜨거운 뉴스는 미국 대선의 풍향계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최대 경쟁자인 버락 오바마 의원에게 승리했다는 것이다. 또 그보다 앞서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연설 도중 피살되면서 국제적으로 부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여성상위시대’ 외치는 언론의 호들갑
사실 2007년 한 해만 해도 여성 리더십의 부각은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진 현상이다. 지난해 10월 말 아르헨티나 대선에서는 여성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압도적인 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했고, 인도에서도 첫 여성 대통령 프라티바 파틸 라자스탄이 등장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을 조정하는 인물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라는 외신 보도도 주목을 끌었다. 하버드대에서는 371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인 드루 갈핀 파우스트가 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2005년 독일의 첫 여성총리로 취임해 세계 언론으로부터 ‘독일의 철(鐵)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앙겔라 메르켈이나, 버마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인 아웅산 수치 여사도 국제적으로 강력한 여성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대권의 꿈을 잠시 보류해야 했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파워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역대 첫 여성 인수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이 외에도 우리 국민은 최근 몇 년 사이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 최초의 여성 법제처장, 최초의 여성 장성, 최초의 여성 프로복싱 심판, 최초의 여성 총리의 탄생도 목격했다.

언론은 이때마다 ‘여성상위시대’를 외치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정·재계 등 각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고위직 여성 수는 여전히 미미하다는 점에서 이 같은 일부 여성 리더의 부각을 두고 ‘여성상위시대’ 운운하는 것은 과장된 점이 있다. 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여성계의 시각이다.

2007년 여성 권한척도 ‘한국은 64위’

실제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학술지) 9월호는 ‘여성과 리더십의 미로’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과거의 유리 천장처럼 절대적인 장벽은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여성이 사회 초년병으로 입사해 CEO급에 오르는 길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로처럼 분명 출구는 존재하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길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고 밝혔다. 유리 천장은 여성들의 고위 또는 중간관리직 진출에 방해가 되는 무형의 장벽을 일컫는다. 1986년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 캐럴 히모위츠가 직장 내에서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을 짚는 글에서 처음 사용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서 이사회 멤버에 포함된 여성은 15%, CEO 자리에 오른 여성은 2%에 불과하다. 유럽 국가의 경우도 여성 CEO 비율은 평균 4% 수준이며 임원도 11%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국 상황은 어떨까. 노동부가 지난해 7월 상근 근로자 1000명 이상의 기업과 정부투자기관, 정부산하기관 등 613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06년 12월 현재 여성 임원 비율은 4.4%에 불과하다. 특히 국내 주요 그룹 대부분은 여성 임원 비율이 1%도 안 된다. 2006년 말 HR 전문 포털 인크루트가 578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채용 인원의 약 30%가 여성이다. 경제활동에 뛰어든 여성 비율에 비해 고위직에 오른 여성 수가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다. 또 중앙부처 4급 이상 중 의사결정직에 있는 여성 비율은 5.4%, 의회 여성점유율 13.4%(OECD 평균 24.2%), 초·중·고 교장과 교감 12.8%(교원의 59.5%가 여성)이다. 2007년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에서 93개국 중 한국은 64위, 2006년 성별격차지수에서 115개국 중 한국은 92위로 나타났다. ‘여성리더십의 만개’라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일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양희 선임연구위원은 “직업세계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의지가 높고 실제 생존률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대다수 여성들은 유리 천장 아래 몰려 있고 극소수만이 유리천장을 깨고 의사결정직에 오르거나 구색 맞추기로 임명된 것”이라며 “이들의 상징성이 크다 보니 언론매체가 대서특필해서 마치 여성들의 리더십 진출이 일반화한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은 또 “리더십 위치에 오른 소수의 여성들은 그 상징성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쏠리고 ‘내가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 여자를 의사결정직에 앉히지 않을 것’이라는 부담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여성 리더가 탄생할 때마다 언론매체가 앞 다투어 ‘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대서특필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게 여성학자들의 주장이다.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도 기자회견에서 ‘여성총장’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자 “나는 하버드대 ‘여성 총장’이 아니라 하버드대 총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소수라도 여성이 의사결정직에 오르는 비율이 해마다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숙명리더십개발원의 장영은 원장은 “서양에서 여성에게 대학 문호를 열며 고등교육의 기회를 준 것이나 참정권을 준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고, 우리나라는 19세기 말부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여성교육전문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에 진입해서야 실질적으로 많은 여성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안에 우리 나라의 여성이 전문여성교육을 통해 급속하게 각계에 진출하고 특히 경제계와 학계 등에서 여성 수장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고 밝혔다. 장 원장은 그러나 “아직도 여성이 각 분야의 최고위직으로 진출하며,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덧붙였다.

여성 스스로도 ‘여성리더’에 편견
그렇다면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 수에 비해 고위직까지 오르는 여성 수가 턱없이 적은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의사결정자들이 남성이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양희 위원은 “리더의 자리에 오른 여성이 소수이면 아무리 여성적 가치를 이야기해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면서 “물리학에서 ‘임계질량’이라는 말이 있듯이 최소한의 변화를 이루려면 의사결정자 중 여성의 비율이 30%는 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권만 봐도 여성 국회의원 수는 전체의 15%도 안 된다”고 여성 리더십이 만개하지 못하는 이유를 지적했다.

이진아 브랜드 유 리더십센터 소장은 “세상은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며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는 부드러움과 창의성, 감수성, 다양성, 유연성 등 여성적 특성을 가진 리더를 원하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시스템은 권위적인 20세기 리더십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기존 권위적인 카리스마에 21세기형 여성 리더십의 이미지를 겸비한 남성을 리더의 자리에 앉힌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2006년 서울시장 선거를 꼽았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오세훈 후보의 대결에서 서울시민들은 공약사항과 관계 없이 여성인 강 전 법무장관 대신 부드럽고 참신한 이미지를 가진 남성인 오세훈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남녀 성 역할을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조직문화도 장벽이 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성공적인 여성 인력 활용 포인트’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여성인력들은 “여성에게는 핵심 업무보다 부수적인 업무, 주변 업무를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 관리자들이 여성에게 주요 업무를 맡기기에 앞서 ‘여성인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현대 기업을 중심으로 본 한국의 여성 리더십‘이라는 보고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구성원들은 여성 리더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여성은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고, 리더십을 통제와 명령 차원으로 이해해 리더십에서의 여성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여성 자신도 여성 리더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통적으로 여성적 가치가 리더의 자질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리더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어 남성 리더를 역할모델로 삼음으로써 남성 리더의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여 전형적인 전사형 리더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이 여성성을 버리고 상명하복식의 권위적인 남성적 리더십 스타일을 취하는 게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여성이 일과 출산 및 양육을 병행하는 구조도 여성이 상층부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일과 가정이 맞물리면서 갈등이 고조되면 쉽게 업무에 방해를 받을 뿐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여성 리더십 전문가인 루더만과 오롯은 여성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가정 일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래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식을 기반으로 한 21세기는 여성의 섬세함과 유연성,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강조되는 시대”라고 오래전부터 주장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엘빈 토플러는 “사회가 여성 지도자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여성들이 정치에 좀 더 많이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2007 세계 여성포럼’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사고방식과 시스템이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리더를 꿈꾸는 여성들이 깨고 넘어서야 할 유리 천장은 여전히 두텁다. 우리 사회에 오랜 세월을 거쳐 고착화한 리더나 여성에 대한 각종 편견을 깨부수려면 더 많은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고위직에 올라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리더십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서는 여성 자신은 물론 기업과 국가, 그리고 구성원들이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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